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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3. 13世 〉7. <요재공>학생공휘명익묘갈명(學生公諱溟翼墓碣銘)
1. 문헌 목록 〉13. 13世 〉9. <부정공>처사휘시구가장(處士諱時耈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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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요재공>석남재기(石南齋記)휘기(諱琪)
石南齋記 普成之治東北二十里許 有石虎山勢崛嵂壓覆十里 下有程川橫帶而隔江有大龍山其高與此山等相望雄峙 爲一鄉勝槩 石虎山一枝 向南起伏數節而下 臨江而止 環抱盤踞 世所稱伏虎吉崗也崗中纍纍然 有堂斧形者九 實淳昌趙氏世葬之地 而負寅原 其爲最尊位 朝山大夫軍資監僉正諱琪幽宅也 其配令人珍原朴氏祔于後寅坐 繼配靈光丁氏祔左雙塋第二子武科嘉善大夫梁山郡守諱廷元葬在左局艮原配貞夫人南平文氏與之雙塋 第三子丙子倡義諱廷亨葬在右局艮原 配寶城宣氏祔焉 孫通德郎諱振玉葬在祖考墓後艮原 配長興任氏衛祔焉 謹案家版 僉正公堂壬辰兵燹 邦内書籍灰燼 能誦傳七書 刊行于山陽 播傳册版於全邦 自餘文獻甚多而累經兵燹 今無一傳可勝惜哉 梁山公早登武科 仕于朝 時 爾瞻用事 聞其才行 累次求見 公 疾其爲人 竟不往 爾瞻擧除梁山郡守 以市恩 公即日歸鄉 因不赴仕 當丙子亂與弟廷亨廷顯倡義 通德郎公 亦以孝行 著聞薦除通德郎 盖忠孝繼世之家 而此崗即其三世九位之攸芋 而子孫歲薦芬苾之所也顧久關墳菴只有直室一棟 每當霜露之節 諸孫會集 不惟艱於齊宿 亦嫌庖廚之罔所 以是齎恨者火矣頃歲東植 珪勳諸氏 始營置若于穀 累年拮据 而事巨力綿 未及成就而歿 越數年後 戊午歲事餕 席宗議復發四五諸氏率先出義 於是諸宗 巡訪京鄉 鳩聚誠金 遂以起後 不朞年 而功吿訖 翌年直室 又從而成 吁其懿矣 可謂肯搆而背堂者矣 其飲落之日 余亦以傍裔往參焉 諸宗咸曰齋 不可以無標榜 何以則可乎 余敬應之曰齋建於石虎山之南命之石南何如 僉日甚當 因求記於余 余以不文周辭之 後累年 又見訪請益勤 余參在傍裔不敢終辭 爲之叙實曰是役也 殫誠竭力手胼足 終始賢勞者東旭氏也 其與倡謀鳩財者昌鉉奉鉉元柱世勳諸氏也嗚呼凡今後孫 升降此齋者勿以齋功吿成 爲吾事己了 尤篤於追遠報本之誼 而聿修厥德 又加備於丙舍之體制 是爲繼述之大者也 而將亦增采於虎山矣 僉宗勉於哉 余居在山下近村 而愧無 一毫之助於是役而 難孤僉宗之懇 以其所見聞者 忘僭而記之如右云 乙丑陽月上澣 傍裔 台勳 謹識 석남재기(石南齋記) 보성군 동북 二十里허에 석호산이 있으니 산세가 높아 十里를 덮어 눌렀고 아래로 정자천이 횡대하고 대룡산이 있어 강에 닿아 그 높이가 이산과 등등하야 웅장하고 높아 상대하니 一향의 승경이 되었다. 石虎山 一지가 수절기복하여 내려와 江에 임하야 근처 둘러싸이고 서리여 안겼으니 세상이 칭한바 북호길강이다. 강중에 유유히 서로 잇다 라 봉분이 솥처럼 아홉이니 실지 순창 조 씨 세장지지인데 인좌원은 그의 최존위는 조산대부 군자감청정 휘 기(琪)의 묘이다. 그 배위 영인진원 박 씨는 뒤에 인좌로 부장하였고 계배 영광 정 씨는 좌편쌍영 부장하였으며 제二子무과 가선대부 양산군수 휘 정원(廷元)은 좌국에 안장하였고 배위 정부인 남평 문 씨는 같이 쌍분하였고 제三子 병자창의 휘 정형(廷亨)은 우국에 간좌로 안장하였고 배위 보성 선 씨는 합장하였다. 손자 통덕랑 휘 진옥(振玉)은 祖考묘 뒤에 간좌로 안장하였고 배위 장흥 임 씨는 쌍분으로 모셨다. 삼가히 가첩을 살펴보면 첨정공(僉正公)이 임진병선에 나라 안에 서적이 다 타서 능히 七書를 입으로 외워 우리 고을에 펴고 책판으로 전방에 전파하였으니 스스로 남은 문헌이 심히 많았으나 여러 번 병화를 겪어 하나도 남음이 없으니 가히 여기어 아깝도다. 양산공(梁山公)은 일찍 무과에 올라 조정에 벼슬할새 때에 이첨(爾瞻)이 공의 재행을 듣고 여러 번 보고저 하되 공이 그 사람됨을 미워하야 마침내 가지 않으니 이첨이 천거하여 양산군수를 제수받았으나 세상 좋게 하기 위하여 공이 직일로 고향에 돌아와 다시는 벼슬하지 않으시고 병자란을 당하야 아우 정형정현(廷亨廷顯)과 더불어 창의하였고 통덕랑 공은 또한 효행으로써 저문하야 천제 통덕랑하였으니 대개 충효계세의 집인데 이 자리는 곧 그 三世九位의 묘를 모시어서 자손이 해마다 제사 모시는 곳이라 돌아보건대 오래도록 제각이 없이 직실 한 채만 있어 매양 시제 때를 당하여 모든 자손이 모이면 자눕기만 곤란할 뿐 아니라 또한 표주할 곳도 없어 이로써 한이 쌓인 지 오래더니 중년에 東植, 珪勳 諸氏가 비로소 경영하야 약간 곡식을 누년길거 하였으나 일이 크고 힘이 모자라 성취에 미치지 못하고 수년을 넘긴 후에 무오년 묘제 때에 종의가 다시 발의하야 四五제 씨가 솔선하여 출의하고 이에 제종이 경향을 순방하야 성금을 모아 드디어 일을 시작하여 기년이 못되어 준공을 하고 이듬해서 직실이 따라서 이루어졌으니 오홉고 아름답다. 이 가히 전에 못 할 일을 하였다 할지로다. 그 락성하는 날에 내 또한 방손으로서 참석하였더니 저종이 다 말하기를 재는 재호가 있어야 하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거늘 내가 경응하여 말하기를 재가 석호산 남쪽에 세워졌으니 석남재라 한 것이 어떤가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옳다고 하며 내게 기문을 부탁하거늘 내가 글을 못 한다고 굳이 사양하였더니 누년 후에 또 찾아가 더욱 간청하니 내 또한 방손의 위치에 있으므로 감히 사양치 못하고 서설하여 왈 이 일에 정성과 힘을 다하여 손발이 부르트도록 시종일관 현로자는 동욱(東旭) 씨이다. 그 다못 창모구재한 자는 창현봉현원주세훈(昌鉉奉鉉元柱世勳)저 씨이다. 오홉다 이재부터 후손이 이 집에 드나들 때 집을 다지었으니 나 할일 다했다 하지 말고 더욱 추원보본의 의를 돈독히 하여 또 제각의 모양을 더 갖추어지면 이것이 계술의 큰 것이 되고 장차 또한 호산에 빛날 채색을 더할지니 첨종은 힘쓸지어다. 내가 살기를 산하근촌에 있으면서 이 일에 일호도 협조 없음을 부끄러워하며 첨종의 간청을 어기지 못하야 그 보고들은 자로써 찬월함을 있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을축양월상한(乙丑陽月上澣) 방예(傍裔) 태훈(台勳) 근지(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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